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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 넝쿨무늬 대접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서유리) 추천 소장품

오죽 (OJ) 2022. 6. 28. 22:24

여지 넝쿨무늬 대접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서유리) 추천 소장품

여지 넝쿨무늬 대접은 고려 제19대 임금인 명종(明宗)의 무덤인 지릉(智陵)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지릉은 현재 개성시(開城市) 장풍군(長豊郡) 지릉리(智陵里),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과 평지가 접하는 작은 언덕에 있습니다. 지릉은 1916년 도굴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지름의 구조와 부장품 등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걸쳐 도굴된 것으로 보였으며, 이때 발견된 청자는 모두 12점입니다. 이 가운데 한 점이 바로 상감 기법으로 장식한 여지 넝쿨무늬 대접입니다.

 

여지 넝쿨무늬 대접, 고려 12세기 말~13세기 전반, 명종(재위 1170~1197) 지릉 출토, 높이 8.4cm, 입지름 19.8cm, 굽지름 5.6cm, 본관4908
지릉 전경(개성시 장풍군), 1916년 촬영 유리건판
명종 지릉 출토 청자들


실용적인 형태와 장식적인 무늬

 

이 대접은 구연에서 굽 부분으로 선이 완만하게 내려오다 점점 좁아드는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안쪽 면에는 구연 아래 넝쿨무늬의 문양대를 백상감으로 둘렀습니다. 그 아래에는 다섯 군데에 역시 백상감으로 여지(荔枝)무늬를 넣었습니다. 다섯 알의 열매가 달린 가지 형태로 열매의 오돌토돌한 겉 표면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였습니다. 대접 안쪽 바닥에는 평평한 바닥을 만들기 위한 내저원각이 있습니다. 내저원각에는 세 알의 여지를 표현하였습니다. 대접의 바깥쪽에는 안쪽과 마찬가지로 구연 아래에 넝쿨무늬의 문양대를 백상감으로 둘렀습니다. 그 아래 원 안에 모란 가지를 흑백상감한 뒤 그 밖의 공간을 역상감 기법으로 넝쿨을 넣어 화려함을 더하였습니다. 그리고 굽에 가장 가까운 아랫단에는 국화 가지를 흑백상감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대접은 안쪽과 바깥쪽에 상감기법을 이용한 무늬가 화려하게 베풀어져 있습니다. 대접 전체에 투명한 청자유를 시유했고 은은한 회청색을 띱니다. 전체적으로 빙렬(氷裂)이 관찰되며 굽바닥에 규석을 세 군데 받쳐서 구운 흔적이 있습니다.

입지름이 19.8cm에 이르는 큰 그릇으로 이 정도 크기의 대접은 넝쿨무늬 문양대까지 물을 채우면 약 1리터의 용량이 들어갑니다. 이렇게 큰 그릇은 반상기의 일종으로 보거나 찻사발로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액체를 대량으로 담을 수 있어 지금 사용해도 좋을 실용적인 형태임은 분명합니다. 또한 전세품이나 고려시대 가마터에서도 상당량 발견되는 기종(器種)입니다. 이처럼 여지 넝쿨무늬 대접은 장식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갖춘 그릇이었습니다.

상감으로 넣은 열대과일 여지


이 대접에는 우리에게 다소 낯선 과일이 눈에 띕니다. 바로 여지(荔枝, Litchi)라고 하는 열대과일입니다. 여지는 아열대와 열대 기후에서 재배되는 식물로, 중국 푸젠성(福建省)이 주요 산지입니다. 열매는 지름 약 3cm 정도의 둥근 형태로 비늘 모양의 껍질이 울퉁불퉁하게 돌출되어 있고, 익으면 붉은 색이 됩니다. 단단한 씨를 감싸고 있는 과육은 신선할 때 반투명한 흰빛을 띄며 독특한 향을 풍깁니다. 중국 남부에서는 ‘과일의 왕’이라고도 불렀으며, 생으로 먹거나 말려서 차에 넣기도 했습니다. 『동의보감』에서는 ‘맛은 달면서 시고 독이 없다. 정신을 맑게 하고 지혜를 도우며 얼굴빛을 좋게 한다.’라고 하여 여지를 약재로도 사용했습니다.

여지가 널리 알려진 것은 양귀비와 관련된 일화 때문입니다. 과즙이 많고 맛이 달기 때문에 양귀비가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당(唐)의 유명시인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여지를 ‘열매는 딸기 같은데 속살은 빙설 같고 맛은 새콤달콤한 우유죽 같다. 열매가 가지를 떠나면 하루 만에 빛이 변하고, 이틀에는 향이 변하며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라고 한 것처럼, 보관이 매우 어려워 생산지가 아니면 신선한 맛을 보기 어려운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중국 남방에서 열리는 여지가 고려시대 그릇에 표현된 것은 이러한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고려의 토산물이 아니었기에 이 과일은 중국과의 교역으로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차에 향을 더하는 용도로 들여왔거나 약재로 쓰기 위해 수입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상징적인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귀한 과일인 여지를 어선화(御仙花)라고 했으며, 길상(吉祥)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따라서 가까이 두고 쓰는 그릇 외에도 관료 관복의 띠에도 장식되었고, 고려불화의 옷 문양, 고려시대 장신구에도 등장하였습니다.

 

여지모양 금동장신구, 고려, 신수10839


고려청자의 상감 무늬의 소재로 적지 않게 나타나는 여지는 주로 대접에 다섯 알, 혹은 세 알의 홀수로 열매가 달려 있는 가지 형태입니다. 갈라진 잎과 울퉁불퉁한 껍질의 묘사가 비교적 세밀한 편입니다. 수입 열대과일의 특성상 특권층이 향유하고자 하는 취향도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고급 청자를 생산했던 강진 사당리나 부안 유천리의 청자 조각에서 여지무늬가 발견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무늬로 그 시대의 취향이나 교류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강진 사당리 가마터 출토 여지무늬 대접 조각들


왕릉에서 나온 청자의 의미

 

고려시대 왕실은 청자의 주요 수요처였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한 자기는 당연히 그 시대 최고의 기술이 구현된 청자로 고려인이 구사했던 최고의 기술과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왕릉에서 출토된 청자는 왕릉을 만들 때 묻었던 것이기에 연대를 알려주어 청자의 시대적인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릉 등 왕실과 관련된 곳에서 출토된 청자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지 넝쿨무늬 대접 등 지릉에서 출토된 청자들을 보면 전체적으로 맑은 유색을 띠며, 규석을 받쳐 갑발에 넣어 구운 우수한 품질의 것입니다. 명종이 죽은 1202년이라는 연대를 통해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으나, 기형, 장식기법, 무늬 등에서 13세기로 편년되는 희종(熙宗, 재위 1204~1211, 죽은 해 1237) 석릉(碩陵), 원덕태후(元德太后, ?~1239) 곤릉(坤陵) 등의 출토품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부분적으로 회청색의 유색을 띠며, 역상감의 사용 등에서 고려청자의 12세기 비색(翡色)시대에서 13세기 상감청자의 시대로 가는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볼 때 『고려사』의 고종 42년(1255), 몽고군이 훼손한 지릉을 보수했다는 기록에 부합됩니다. 따라서 능을 보수할 때 다시 청자를 껴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처럼 왕릉에서 나온 청자들은 언제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어 고려청자의 편년자료에 도움을 줍니다.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여지 넝쿨무늬 대접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