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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무늬토기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이진민) 추천 소장품

오죽 (OJ) 2022. 6. 27. 08:05

민무늬토기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이진민) 추천 소장품

민무늬 토기 - 청동기시대 문화의 지표 : 


기하학적 무늬가 가득한 토기가 신석기시대를 대표한다면 민무늬 토기[無文土器]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자 당시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한반도의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13세기 무렵 시작됩니다. 시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소재 ‘청동기’가 등장하지만 시대 전반을 아우르는 보편성 때문에 민무늬 토기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로 인식됩니다. 청동기시대를 무문토기시대라고도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민무늬 토기는 어떤 토기일까?

민무늬 토기는 말 그대로 무늬가 없는 토기라는 뜻으로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대비됩니다. 신석기시대 하면 바닥이 뾰족하고 기하학 무늬로 가득한 빗살무늬 토기가 떠오르실 텐데요. 토기 전면을 가득 메웠던 무늬들은 청동기시대에 와서 사라집니다.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에서 청동기시대 토기를 통칭합니다.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간[磨硏]토기를 제외한 바탕흙이 거친 토기, 즉 정선되지 않은 태토로 빚고 거칠게 마무리한 후 한뎃가마[露天窯]에서 800도 이하의 낮은 온도로 구워낸 적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는 토기를 가리킵니다.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유적, 신석기시대, 높이 38.1cm, 신수22891

 

민무늬 토기, 서산 휴암리 유적, 청동기시대, 높이 19.4cm, 신수10887

후자의 개념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 토기는 크게 민무늬 토기와 정선된 태토로 빚은 뒤 표면을 문질러 매끄럽게 윤을 낸 간토기로 나누어집니다. 간토기는 민무늬 토기에 비해 출토량이 많지 않고 제작 시간과 공을 더 들인 토기라는 점에서 실생활보다는 장례나 마을 축제, 가내(家內)의례 등에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붉은색 안료를 바른 청동기시대 간토기는 색이 지닌 상징성(생명, 벽사 등)과 더불어 방수 및 방습 기능이 뛰어나 액체를 담았던 그릇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붉은간토기, 전(傳) 산청, 청동기시대, 높이 13.2cm, 신수2287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썼던 토기 모양

두형토기의 형태, 속초 조양동 유적, 청동기시대, 높이 16.6cm,

청동기시대 토기들은 대부분 바닥이 평평합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모래바닥 해안가에서 구릉이나 하천변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바닥이 뾰족한 토기는 사라졌습니다. 민무늬 토기나 간토기는 크게 목이 있는 항아리[壺], 몸체에서 아가리로 올라갈수록 점차 벌어지는 바리[鉢], 다리[대각]가 달린 두형토기(豆形土器)로 나뉩니다. 두형토기는 청동기시대 이른 시기에 주로 사용되던 것으로 대부분 붉은색의 간토기로 만들어져, 특수한 목적을 띠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기의 구성이나 형태는 달라집니다. 특히 목이 있는 항아리가 점차 많아지는데 이는 수전(水田) 등 농경이 활발해지고 대규모 취락이 조성되면서 나타난 곡물 수확, 저장, 분배, 소비 방식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민무늬 토기=무늬가 없는 토기?

구멍무늬 토기, 청동기시대, 수원 이목동 유적, 높이 40.9cm, 신수24704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민무늬 토기 중 하나가 구멍무늬 토기입니다. 무늬가 없는 토기라면서 구멍무늬라니,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민무늬 토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무늬가 없다는 뜻이지만 이는 무늬가 많이 베풀어진 신석기시대 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명칭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 토기를 잘 관찰해보면 바리 아가리 부분에 여러 가지 무늬가 표현돼 있습니다. 구멍무늬, 눈금[刻目]무늬, 빗금무늬가 보이는가 하면 점토 띠로 아가리 부분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늬들은 시간성과 지역성 더 나아가서는 집단성(계통)을 반영한다고 여겨져 주목받았습니다. 실제로 구멍무늬가 있는 토기들은 남한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반해 점토 띠를 붙인 돋은띠무늬 토기는 한강 유역이나 남강 유역,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토기는 금강 유역 등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가리에 표현된 무늬들조차 사라지게 되는데요. 구멍무늬, 낟알무늬 정도만 한강 유역이나 강원도, 영남 동남부 지역 출토 토기에서 보입니다.
신석기시대와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왜 토기에 무늬가 거의 없을까요? 청동기시대에도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왜 무늬는 사라지게 될까요? 그것은 토기가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집단의 정체성이나 예술성,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주로 토기의 무늬였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새로운 소재인 청동기가 등장합니다. 사회에서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청동 제품에 정교한 기하학 무늬를 베풀어 이를 더욱더 가치 있게 만들었습니다. 청동 제품에 표현된 추상적인 무늬들은 농경사회에서 경외와 신앙의 대상이 된 해, 별, 번개 등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석기시대에 실생활 도구와 예술품 사이 경계선 어딘가에 있던 토기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무언가를 담았던 그릇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고 봅니다.

토기가 말해주는 것

청동기시대 토기 연구는 형태와 무늬가 갖는 시간성과 지역성에 주목하여 그 변화 과정과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토기가 청동기시대 유물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를 통한 시기 구분과 지역 차 연구는 당시 문화상을 복원하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연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토기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담는 도구이고 실생활에서 사용한 사람의 손때가 묻은 것이었기에, 당시 사람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토기는 음식을 먹기 위한 1차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크게 조리용, 식기용, 저장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토기의 크기, 음식을 조리할 때 연료에 의해 토기 겉면에 남은 그을음, 내용물이 흘러넘치거나 안쪽에서 타 남은 흔적, 토기의 출토 상황이나 토기 내에서 출토되는 곡물 등을 통해 쓰임새를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때때로 토기는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의례용으로, 또는 죽은 자의 시신을 담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민무늬 토기 - 청동기시대 문화의 지표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