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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광장 - 대련여행 (1)

오죽 (OJ) 2018. 11. 19. 19:44

성해광장 - 대련여행 (1)


11월3일~5일,  2박3일 일정으로 중국 대련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거리가 1시간 정도이니 별 부담없이 가볍게 다녀 올 수 있는 여정이다. 돌아 오는 날은 호텔에서 아침식사만 하고 공항으로 직행하는 스케쥴이라 실제 관광은 이틀 뿐이다. 아침 7시까지 공항 나가는게 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9시40분  아시아나를 타고 대련공항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각으로는 출발지 시각과 별 차이가 없다.(1시간 시차) 패키지여행은 단체 비자라 일행 21명이 번호순으로 열을 지어 입출국 절차를 거치는게 좀 번거롭기는 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갔는데 가이드가 안 보인다. 여행을 자주 다녀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좀 기다리니 원래 가이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대타로 다른 가이드가 급히 불려 나왔단다. 대타 조선족 가이드의 이름은 '차광택'이란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한 이름이다. 대체적인 일정은 첫날은 대련의 중심가인 중산구 근처를 돌아보고, 둘째날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여순쪽을 들러보도록 되어 있는데 여순은 대련시의 한 구 란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여순감옥은 마음 가볍게 다녀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첫번째 목적지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는 성해광장이다. 2012년 중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치스캔들의 주인공 '보시라이'가 대련시장 시절에 만들어진 광장인 모양이다.




* 대련 (, 大連, 다롄) : 랴오닝성(遼寧省)의 도시로 성도인 선양의 뒤를 잇는 제2의 대도시로 랴오둥(遼東)반도 끝에 자리잡은 부동항이다. 역사적으로 랴오둥 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 철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1897년 러시아가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하였다. 인구는 약6백만명. 다롄 시는 7개의 구, 2개의 현급시, 1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순감옥이 있는 여순은 7개 구중의 하나)

 

위진 시대에는 삼산이라 불렀고, 후일 고구려에 속하였다. 고구려 때는 비사성이 있었던 곳이고, 이후에는 청니와(泥窪)라는 이름의 작은 어촌이었으나, 1897년 러시아가 불완전한 부동항인 블라디보스토크를 대체하기 위해 황해에 접한 이 곳에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하였다. 러시아인들은 이 도시를 '달니이'(Дальний)라고 불렀고, 인근에 있으며 이후 다롄에 통합되어 구가 된 뤼순은 '포르트 아르투르'(Порт-Артур)로 불렸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조차지가 되었고 도시 이름도 다롄(大連)으로 바꾸었다. 일본령 관동주청의 중심지가 되었고,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건설하였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잠시 관리하였다. 1950년 뤼순(旅順)과 합병하여 뤼다(旅大)라고 하였다. 1951년 중국에 반환되었고, 1981년 이전의 이름인 다롄으로 돌아갔다.

 

대련은 우리 역사와도 여러 면에서 관계가 깊다. 대련을 포함한 요동반도는 고구려가 광개토왕 14(404)부터 265년 동안 지배를 했던 곳이다. 고구려 시대에는 요동성에 속하였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4개의 산성이 있었다. 중국 학자 허명강에 의하면, 금주구 대흑산에는 비사성(卑沙城), 보란점시에는 외패산성(巍覇山城), 와방점시에는 득리사산성(得利寺山城), 그리고 장하시에는 성산산성(城山山城)이 고구려 당시에 축조되어 현재까지 그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한다. (위키백과 등 요약)

 

 

성해광장 (星海廣場 싱하이광장) : 다롄시 창립 100주년과 홍콩 반환을 기념하기 위하여 1997년 건립하였다. 아름다운 성해만에 위치하여 해만에 따라 이름을 얻게 된 성해광장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총 면적 176만㎡이고 광장 안 내원 지름은 199.9m이다. 광장에는 커다란 책을 펼쳐 놓은 듯한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는데, 도시의 개방성과 100년 동안 변화해온 다롄의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이와 함께 100쌍의 발자국을 새긴 80m에 이르는 길도 설치해 놓았는데, 1세의 어린 아기의 것부터 100세 노인의 발자국까지 있다. 광장 중앙에는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중국의 기상을 표현하는 조각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부근에는 싱하이국제전시센터, 현대박물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어 경치도 좋고, 또한 주변에 놀이기구까지 많이 있기 때문에 항상 사람으로 붐빈다. 여름에는 광장에서 맥주축제도 열린다고 한다. 대련여행의 필수코스. (두산백과 외)

성해광장은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재임시 이룬 업적 중의 하나이나 그가 2012년 최악의 정치스캔들로 실각한 이후 '보시라이' 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금기시 되고 있는 듯 했다.

 

 

* 보시라이(薄熙) 사건 : 보시라이는 중국 혁명 원로 중 하나인 보이보(薄一波)의 아들로 문화 대혁명 시기에 홍위병운동의 주동 멤버로서 "뿌리가 붉으면 붉은 싹이 나온다"라고 하는 계급론을 강조하였다. 1992년부터 다롄의 시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세워 입지를 강화했고, 2001~2004 랴오닝 성 성장. 2007~2012 충칭시 당위원회 서기였다. 보시라이는 충칭시 당서기 재임 중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 운동으로부터 지속된 공산주의 혁명 가요곡을 노래하자는 캠페인을 실시하였고, 개혁개방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시대를 생각하자는 창홍타흑(唱紅打黑) 운동을 전개하여 충칭 관리의 부정부패 적발과 조직폭력 범죄자 처형이라는 실적 공개에 앞장 서고, 1,500명 이상을 적발하였다.

 

그런데 2011 11월 보시라이 일가와 오래전 부터 친밀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 닐 헤이우드(Neil Heywood)가 충칭시 소재의 한 호텔에서 원인 불명으로 사망하고 보시라이의 심복이었던 왕리쥔(王立軍)이 충칭시 공안국장에서 직위해제된 직후인 2012 2월 정부 기밀문서와 최고 지도층의 권력 투쟁을 담은 서류 등을 가지고 칭다오의 미국 총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보시라이사건이라 불리는 중국 최대의 정치스캔들이 터져나왔다. 이 사건은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보이보(薄一波, 1908~2007)의 둘째 아들이자 유명 정치인인 보시라이와 관련됐다는 점 때문에 초기부터 화제가 되었다. 당시 보시라이는 망명을 시도한 왕리쥔 직속 상관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2012 3 15일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다 왕 전 공안국장이 미국 영사관에 간 것은 앞서 2011 11월 사망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죽음이 계기가 되었고, 보 전 서기의 부인인 구카이라이가 이 사망과 연관 있는 것으로 공식 확인되면서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 사건은 왕리쥔의 망명 신청, 구카이라이와 사망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내연관계 여부가 쟁점으로 떠오르고, 이면에 중국 권력투쟁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국 최악의 정치 스캔들로 남게 되었다. 2012 4월 중국과 해외 언론은 헤이우드의 죽음에 대해 보 전 서기 가족과의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과 헤이우드가 수십억 위안에 이르는 보 전 서기 가문의 해외재산 도피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구카이라이와의 내연관계가 알려진 것 등이 원인이 되어 살해되었을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결국 보시라이 전 당서기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開來)는 헤이우드를 독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았고, 보시라이도 뇌물 수수, 직권남용, 인사규정 위반, 여성편력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