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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정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큐레이터 박해훈 추천 소장품

오죽 (OJ) 2022. 1. 24. 23:12

심사정의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큐레이터 박해훈 추천 소장품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는 눈 내리는 겨울 날, 봄소식을 기다리며 선비가 매화를 찾아나서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는 탐매도(探梅圖)라고도 하는데, 중국 당대의 유명한 시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탈속하고 고아한 선비의 대명사로 인식된 맹호연의 고사

 

<파교심매도>, 심사정, 조선 1766년, 비단에 엷은 색, 115.0 × 50.5 cm

파교심매도는 조선시대에 화가들이 즐겨 그린 듯 비교적 많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교전인 『사서오경』이 교양의 기반이었고 회화에서도 문인과 관련된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 화제(畫題)를 많이 다루었는데 ‘파교심매’ 역시 문인 취향에 적합하여 많이 그려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중국 당나라 시인 맹호연은 하북성 출신으로 40세쯤에 장안으로 올라와 진사 시험을 쳤으나, 낙방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만년에 재상 장구령의 부탁으로 잠시 그 밑에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도연명(陶淵明, 365~427)을 존경하여 천석고황(泉石膏肓)의 마음으로 평생 유량과 은둔생활을 하며 술과 가야금을 벗 삼아 자연의 한적한 정취를 사랑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는 이른 봄 매화를 찾아 당나귀를 타고 장안에서 파교를 건너 눈 덮인 산으로 길을 떠났다고 합니다.

맹호연의 고사는 탈속하고 고아한 선비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파교심매, 설중탐매(雪中探梅)의 모습으로 그림에 등장합니다. 이들 그림에는 눈이 가득 쌓인 적막한 산골에 핀 매화와, 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 그리고 매화음(梅花飮)에 필요한 음식과 술 그리고 시를 짓기 위한 문방구 등을 담은 보따리를 들고 따르는 시동이 등장합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60세 때인 1766년에 그린 이 그림도 맹호연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입니다.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려는 선비와 그를 따르는 시동이 화면의 초점을 이루고 있으며, 그 주위는 삭막한 겨울 풍경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나 인물의 묘사에서 《고씨화보(顧氏畫譜)》의 곽희본(郭熙本)과 장로본(張路本)을 참고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라 껍질 모양의 언덕과 가지만 남은 헐벗은 한림(寒林), 그리고 화면을 압도하듯 솟아난 둥글둥글한 산 모양이라든가 구불구불한 필선들은 심사정 만년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줍니다.

심사정은 18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대표적인 선비화가로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입니다. 정선(鄭敾, 1676~1759)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하며, 산수, 영모(翎毛), 화훼(花卉), 초충(草蟲)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났으나, 그 중 특히 산수를 잘 그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 정선과 더불어 삼재(三齋)로 일컬어졌습니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심지원이 영의정을 지낼 만큼 명문가였으나 조부인 심익창이 과거시험에 부정을 저지르고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된 후 몰락하여 출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친 심정주와 심사정은 그림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사진. <파교심매도> 확대.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려는 선비와 그를 따르는 시동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려는 선비와 그를 따르는 시동. 이 그림은 심사정 만년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의 탐매도(探梅圖)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탐매도로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은 신잠(申潛, 1491~1554) 전칭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라고 지칭되기도 하는데 화면상에 관인(款印)은 없으나 신잠의 작품으로 전해집니다. 역시 추운 겨울 파교를 건너 매화를 찾아 나선 맹호연의 고사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화면의 변색이 심하나 바위, 나무, 인물 모두 세필(細筆)로 그렸고, 바위 사이사이와 대나무 등에 칠해진 녹색이 두드러지며, 긴 화면을 따라 그려진 소재들의 자연스러운 조화 등 화면 전개에서 구성의 묘가 돋보입니다. 이제 막 파교에 들어선 선비는 기대와 설렘에 길을 재촉하지만 추운 겨울 억지로 따라 나선 시동은 발걸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탐매도>, 전(傳) 신잠, 조선 16세기 전반, 비단에 엷은 색, 43.9 × 210.5 cm

신잠은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으로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증손자입니다. 그는 시, 서, 화에 두루 능해 삼절(三絶)로 지칭된 사대부로 그림에서는 산수뿐 아니라 묵죽(墨竹)과 묵포도(墨葡萄)에도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그림은 남아 있지 않으며, 이 작품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습니다. 이 <화조도> 또한 채색의 사용 및 공필(工筆)에 가까운 필치 등이 두드러져 보입니다.

한편 일본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소장의 <파교심매도>는 신잠 전칭의 <탐매도>와 연관이 깊은 작품입니다. 화면의 형식과 필묵법에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유사한 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필묵법이 보다 거칠고 평면적인 화면 구성 등에서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浙派) 화풍의 특징이 보입니다. 김명국(金明國, 1600~1662)의 <탐매도>는 이미 매화를 찾아 완상(玩賞)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선비는 지팡이를 짚고 서서 의연히 매화를 보고 있지만 그 옆의 술병을 들고 있는 시동은 추위에 몸이 잔뜩 움츠러져 있습니다. 빠르고 거친 필치로 서정적인 분위기뿐만 아니라 인물의 대조적인 심리를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일본 야마토분카간(大和文華館) 소장의 <파교심매도>(좌), 작자미상, 16세기, 비단에 엷은 색, 128.5 × 72.3 cm 김명국의 <탐매도>(우), 17세기, 종이에 엷은 색, 54.8 × 37.0 cm

김명국은 자가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醉翁)이라 하였고 이름은 명국(明國) 외에 명국(命國), 명국(鳴國)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화원(畫員)으로 도화서의 교수를 지냈으며, 17세기의 대표적인 절파화풍의 화가로서 우리나라 화가들 중에서 가장 거칠고 호방한 필치를 구사했던 인물입니다.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크게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의 그림들은 취한 후에 그려진 것이라 합니다. 김명국의 이와 같이 분방한 기질은 명대 절파의 후기 양식인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의 화풍을 받아들였던 그의 작품 세계와도 상통되는 점이 많습니다. 산수와 인물을 잘 그렸는데, <탐매도>에는 그의 특유의 화풍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처표시+변경금지"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 심사정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