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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영의 해산첩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이수경) 추천 소장품

오죽 (OJ) 2022. 2. 3. 10:45

정수영의 해산첩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이수경) 추천 소장품

조선 후기 선비 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은 1797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였습니다. 금강산 풍경을 유탄(柳炭)으로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2년 후인 1799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에 걸쳐 가을 금강산(풍악산) 그림첩인 《해산첩(海山帖)》을 완성했습니다. 지리학자 집안 후손인 정수영은 남다른 관찰력, 독자적인 시각과 경물 배치 방식, 특유의 필법이 특징인 자신만의 금강산 그림을 남겼습니다.

 

<금강전도>, 《해산첩》 제3면, 정수영, 조선 1799년, 종이에 엷은 색, 37.2 x 61.9 cm, 동원 이홍근 기증

금강산의 가을을 담은 정수영의 《해산첩》

 

단풍의 계절 가을이 오면 현대인들은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이를 블로그 등의 개인 홈페이지에 올려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장소라도 개인의 취향 및 관심사, 시각 경험에 따라 촬영 대상이 달라지고, 동일한 대상을 촬영해도 카메라의 종류, 촬영 각도, 촬영자의 기술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생산됨을 깨닫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도 가을 여행의 추억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워서 ‘풍악산(楓嶽山)’이란 별칭이 있는 금강산을 찾은 문인들은 자신이 본 것을 기행문학으로 남겼고 정선, 김홍도, 심사정과 같은 화가들은 직접 접한 금강산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지우재(之又齋) 정수영의 《해산첩》만큼 단풍에 물든 금강산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그림을 찾기 어렵습니다. 엷은 붉은 색채를 이용해서 금강산의 가을을 그린 《해산첩》에는 ‘바다(海)’와 ‘산(山)’이라는 화첩 이름에 걸맞게 산이 배경인 내금강 지역 아홉 점, 외금강 지역 다섯 점의 산그림과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해금강의 네 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수영이 금강산 여행의 여정과 경관에 대해 쓴 글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점 또한 다른 금강산 화첩과는 차별되는 면모입니다.

비 온 뒤 바라본 금강산의 전경, <금강전도>


《해산첩》에 수록된 정수영의 첫 번째 금강산 그림 <금강전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정선식 금강전도와 매우 다르기에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정수영은 눈앞에 펼쳐진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역삼각형 공간에 담았습니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지점을 꼭지점으로 하는 역삼각형 공간은 그가 그 지점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려 경험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각 범위일 것입니다. 이 그림의 앞면에 수록된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정수영은 “새벽에 오던 비가 일찍 개자 재를 넘었다. 재 위에 오르니 일대에 구름이 가로 퍼져 하늘 끝까지 닿아 있어서 어떤 것이 비로봉인지 향로봉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산허리와 산등성이 아래뿐이다. 솔직히 구름이 끼지 않았어도 정확하게 가리키는 사람이 없어서 구별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시각 경험을 반영하듯 그림 속 봉우리들은 개별적인 특성이 살아 있지 않으며, 저 멀리 원경의 봉우리들은 길고 나지막하게 내려앉은 구름에 의해 끝부분이 과감하게 덮여졌습니다. 자신이 본 대로 그리고자 봉우리 끝을 자르는 대담한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앞쪽 좌우측 공간은 편안하게 곡선을 이룬 운무로 마무리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부채꼴 형상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쓴 글에서 좌우측의 운무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운무로 경계선을 처리한 것은 개인의 시각 경험을 전달하면서도 회화적 구성미를 놓치지 않는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는 근경에서부터 원경까지 산봉우리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사뭇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시점, 산과 봉우리의 크기, 색채의 변화를 통해 거리감과 공간감을 살렸습니다. 화가가 위치하고 있는 근경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린 것이나 중경은 화가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시점으로 포착한 것이고 원경은 화가가 올려다보는 경관이므로, 그림을 보는 눈의 움직임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또한 근경의 산과 중경의 봉우리는 비교적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고 그 사이사이의 처리에도 신경을 쓴 반면 원경의 봉우리는 좁고 긴 형태로 간략하게 처리하여 원근감을 나타냈습니다. 알록달록 단풍 든 모습을 표현한 붉은색 담채와 산세에 가한 녹색 계열의 담채의 농도도 근경이 가장 진하고 멀어질수록 점점 엷어졌고 원경에는 채색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색채의 차별적 사용으로 거리감을 연출했습니다.

 

<금강전도> 부분

 

<단발령망금강산도>, 《신묘년 풍악도첩》 제13면, 정선, 조선 1711년

<금강전도>에서 정수영이 앉아 있는 ‘재’가 어느 고개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통상적인 금강산 여정으로 미루어볼 때 ‘단발령’으로 짐작됩니다. 단발령과 단발령에서 바라본 금강산 풍경을 그린 그림들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단발령망금강산도(斷髮嶺望金剛山圖)>이래로 대각선으로 화면을 양분하여 아래쪽에 단발령을, 왼쪽에는 운무에 감싸인 금강산의 백색 암봉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랐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경물을 선택하고 집중하는 회화적 재구성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정수영은 당시 유행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현장의 모습을 자신이 인지한 방식대로 그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는 정수영 집안 가풍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지도 제작에도 관여한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12대손이며, 증조부 정상기(鄭尙驥, 1681~1763)도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입니다.

 

<천일대망금강산도(天一臺望金剛山圖>, 《해산첩》제9·10·11면

 

<천일대망금산도> 부분, ≪해산첩≫ 제10면 중

 

<정양사도> 부분, 정선, 조선 18세기

유례없이 화첩 세 면을 활용해서 ‘천일대(天一臺 또는 天逸臺)’와 ‘헐성루(歇惺樓)’에서 조망한, 봉우리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광대한 내금강의 풍광을 펼쳐놓았습니다. 가운데 면 아래쪽에 그려져 있는 천일대는 내금강 정양사 동쪽에 있으며, 정양사 망루인 헐성루와 더불어 금강산의 대표적인 전망대입니다. 정수영은 헐성루와 천일대를 여러 차례 오르내리면서 내금강산의 장관을 조망했습니다. 키 큰 침엽수림이 심어져 있는 천일대에는 연록색 담채가 칠해져 있는데, 산줄기에 가해진 붉은 담채와 대조를 이루면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바라본 금강산 경치를 그리는 전통은 조선 중기부터 확인되며, 정선도 이곳의 풍경을 담은 <정양사도>를 그렸습니다. 정선 그림 속의 천일대 위에서는 선비들이 내금강의 장관을 감상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정양사 헐성루, 천일대, 금강대와 산봉우리들을 그렸고 이 경물들을 대각선 구도로 배치하여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냈습니다. 짜임새 있는 공간 구성이기는 하지만 정선이 실제 본 풍경이라기보다는 선택과 생략을 통해 회화적 변형을 거친 공간을 연출해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정수영의 그림은 천일대를 봉우리들과 바로 맞닿아 있게 그렸고, 봉우리들이 밀집되어 있어서 거리감이나 공간의 깊이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정수영은 천일대에서 조망한 모든 것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눈과 수평을 이루는 시점으로 경물들을 일렬로 늘어놓았습니다. 그가 본 것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절한 방식일 것입니다. 미적 재구성보다는 개인의 시각 경험을 기록하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내금강의 뾰족뾰족한 봉우리들이 가로로 길게 늘어선 <천일대망금강산도>를 보고 있으면 그가 경관의 기세에 눌려서 “눈이 아찔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잠시 (헐성루) 난간에 기대어 진정했다”는 그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그가 경험했을 시각적 위압감에 충분히 공감하게 됩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서 있어서 숨이 막힐 듯하지만 산줄기를 타고 붉은 단풍이 점점이 수놓아져 있어서 산뜻함과 시각적 다채로움을 선사합니다.

 

<천일대망금산도> 부분, 《해산첩》 제10면 중

 

<천일대망금산도> 부분, 《해산첩》 제11면 중

봉우리에 개별적 특성을 부여하지 않았던 <금강전도>와는 달리 ‘가섭봉’, ‘월출봉’, ‘일출봉’, ‘소향로봉’, ‘대향로봉’, ‘혈망봉’, ‘청학대’와 같은 주요 봉우리들은 특징을 잘 포착해서 그렸고 명칭을 적어 놓아서 각 봉우리들의 대략의 위치와 생김새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해산첩》 제9면 우측에 적혀 있는 글에도 산봉우리들의 형상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습니다. “중향성(衆香城) 서쪽으로 뻗은 산맥이 떨어져서 대향로봉(大香爐峰)이 되고 또 소향로봉(小香爐峰)이 되는데, 모두 검푸르며 꼭대기의 뾰족한 부분은 흰빛이다. 그 아래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것이 청학대(靑鶴臺)이다. 돌이 쌓여서 대(臺)가 이루어졌고 대 위에는 이상한 돌들이 널려 있었다”라는 글의 내용대로 그림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금강산 여행에서 남긴 그의 글이 다른 사람들의 기행문에 비해 객관적인 서술에 뛰어났듯이 그림에서도 자신이 인지한 경관에 가능한 가깝게 기록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화첩을 완성하는 데에 6개월이라는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아울러 그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였을 거라고 추측해보게 됩니다.

거친 풍랑을 그린 <군옥대도>


외금강 동쪽 해안가 해금강의 군옥대(海金剛群玉臺圖)를 그린 그림에서도 정수영의 독자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화면 위쪽의 글에는 “입석포(立石浦)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 날에 ‘풍랑’이 일어서 배에서 두려움을 느껴 5리쯤 가다가 해금강에서 배를 댔다. 돌봉우리가 우뚝 수십 길이 될 만큼 솟아올랐는데 이것이 군옥대(群玉臺)다(중략).”라고 적혀 있습니다. 높낮이가 다른 비쭉비쭉한 돌봉우리들을 늘어 세워서 군옥대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조선시대 해금강을 그린 다른 그림들에서는 돌봉우리들을 앞뒤로 배치하여 공간감을 연출했는데 정수영은 이번에도 일렬로 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쪽에 바람에 의해 일렁이는 파도를 그렸습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시점과 구성이지만 풍랑을 부각시켜서 표현하고 싶은 그의 의도에는 적합한 구성입니다. 그가 진정 그리고 싶었던 것은 그가 경험한 ‘풍랑’이었을 것입니다.

 

<해금강 군옥대도>, 《해산첩》 제23면


개인적 여행 경험의 기록 《해산첩》

 

정수영은 자신의 현장 경험을 그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자신의 방식대로 대상을 파악하고 공간을 형상화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선호하는 구도보다는 자신의 금강산에 대한 기억을 화폭에 옮기는 데 적절한 구도를 선택했습니다. 정수영은 전문적인 훈련을 통해 갖추게 되는 능숙하고 유려한 필치와는 거리가 먼 투박한 필선과 기교가 없는 정직한 구도를 채택해서 자신만의 독특한 금강산을 만들었습니다. 그림에 소양이 있는 문인으로서의 자신의 뜻을 구현해낸 것입니다. 정수영은 금강산 그림을 타인에게 주문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주문자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미적인 요소를 극대화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인 헌적(軒適) 여춘영(呂春永, 1734~1812)과 함께 한 여행에서 지리학자 집안 출신답게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첩》은 왕의 명령으로 금강산을 여행한 김홍도, 김응환의 그림과도 다르고 안동 김씨 가문에 영향을 받은 한 정선의 그림과도 달랐던 것입니다. 이처럼 《해산첩》은 진경산수란 실재하는 대상을 그린다는 것이지 그것을 그려내는 방식은 화가 개인의 인지하는 시각과 형상화하는 능력, 제작 배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가) 창작한 해산첩(海山帖), 정수영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