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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산, 러시아거리 - 대련여행 (6)

오죽 (OJ) 2018. 11. 20. 04:26

백옥산, 러시아거리 - 대련여행 (6)

 

여순은 천혜의 항구로 지금도 중국해군의 군항으로 사용되고 있고 역사적으로는 러일전쟁의 격전지였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2만여명, 러시아군 5천여명이 전사하였다는데 백옥산에는 일본군이 세운 위령탑이 있고 여기에서는 여순항과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우리가 간날은 날씨가 흐려 아쉬웠지만~~


백옥산 풍경구 : 여순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 국가AAAA 급 관광풍경구, ()급 문물보호단위이다. 백옥산의 원명은 서관산(西官山)으로 청나라의 이홍장(鸿)이 여순을 시찰할 때 백옥산으로 개명하였다. 백옥산의 해발고도는 130미터이고, 정상에 오르면 여순구의 전경, 수려하고 웅장한 군항 및 위풍당당한 해군함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풍경구에는 백옥산탑이 있는데, 이탑의 원명은 '표충탑'(表忠塔)으로 러일전쟁중 사망한 일본군 유골을 보관하기 위해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东乡平八)와 제3군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수 천명의 중국인을 강제 노역시켜 1907~1909년에 걸쳐 건설한 것이다. 탑높이는 66.8미터로서 총 273개 계단, 18개 창문이 있다. 탑 정상 북측의 명문 및표충탑”(表忠塔)이라는 세글자는 1945년에 소련군에 의해 지워졌다. 1986년 백옥산탑으로 정식 명명되였다.



 

 

 

 

 

 

 

* 러일전쟁-여순전투 : 여순전투는 1904 2 8, 차가운 겨울 바람 속에 불타올랐습니다. 일본 해군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항 안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폭발한 전투였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마다 늘 그래왔듯, 이번에도 선전포고 없는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이었습니다. 러시아 함대는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습니다. 이튿날 일본 연합함대는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으나, 러시아측 해안 포대의 사격이 워낙 위력적이라 상당한 손상을 입고 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큰 바다로 물러갔습니다.

 

 러시아 군대가 진치고 있던 여순 외곽의 남산을 일본 군대가 공격함으로써 육지에서도 첫 교전이 일어났습니다. 양측 모두 이미 각오하고 있던 전쟁이었습니다. 부동항을 원하는 러시아나, 중국 대륙 진출로를 확보해야 하는 일본이 여순에서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양국 군대의 증원군이 여순의 전장으로 계속 몰려들었습니다. 일본군 보병의 대부대가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여순과 북쪽으로 연결된 철도를 절단하여 외부 연결 통로를 폐쇄했습니다. 여순항도 봉쇄했습니다.

 

러시아의 보병 역시 대련과 여순 사이에 두 개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습니다. 실로 처절한 공격에 격렬한 방어였습니다. 양군의 살벌한 대치 속에서 7월의 대석교 전투, 8월에 양국 해군이 여순항 밖에서 접전한 황해 전투 등 접전이 잇달았습니다. 여순에서 싸우고 있는 두 군대의 지휘관 모두 만 리 밖에 있는 위력적인 러시아 발트함대 생각뿐이었습니다. “발트함대가 오기 전에 끝내자!” “발트함대가 올 때까지 버티자!” 외곽전도 치열했습니다. 8월 말 벌어진 요양(遼陽) 전투는 세계 전사(戰史)에서 ‘20세기의 대전투 중 최초의 전투’로 기록되는 처참한 싸움이었습니다. 일본군을 지휘한 것은 육군사령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으로, 사상자 2만 이상의 손실을 낸 격전 끝에 패전보다 별로 나을 것 없는 승전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힘겨운 대치 상태를 깨뜨린 것이 유명한 여순항 서부지역의 ‘203고지 쟁탈전’입니다. 여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인 후석산 산정은 해발 203m의 고지. 여순항 전체가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는 이 중요한 전략 지점엔 이미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9월 중순이 되자 일본군은 돌연 전략을 바꾸어 공격의 주력을 후석산정으로 돌려 고지 쟁탈전을 시작했습니다. 12 5일 일본군이 고지를 점령하기까지 피아간에 막대한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11 28일 하루 동안 일본군은 8000명의 사상자를 냈을 정도였습니다. 일본군은 봉쇄된 항구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에 대해 정밀한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불과 이틀 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러시아의 전함과 순양함 50척이 모두 침몰했고, 여순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1905 1 2일에 러시아군의 항복 사자가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에게 갔습니다.

 

여순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열도는 온통 환희에 불타 올랐습니다. 국제적 파장도 엄청났습니다. 일본의 승전 가능성을 확신하게 되어 전쟁 경비 조달을 위한 일본 정부의 국채 모집이 매우 수월해진 반면, 러시아는 국제적인 위신의 추락은 물론 국내의 국민 통치에까지 막심한 그늘을 만들었기에 뒷날 레닌이 “여순의 항복은 차르 체제 항복의 서막이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습니다.

 

승자가 패자보다 훨씬 더 막심한 상처를 입었던 이상한 전투, 여순 전투의 승리는 러일전쟁 전체의 승패를 갈랐습니다. 온 유럽을 떨게 한 저 위력적인 발트함대의 운명에도 막심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투의 후일담도 유별납니다. 여순 전투를 지휘했던 일본군 사령관 노기 장군의 두 아들은 모두 이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것도 두고두고 그의 경력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귀국 후 노기는 메이지 천황에게 사죄의 자살을 하겠다고 청했다가 자신이 죽기 전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대꾸를 들었는데, 7년 뒤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노기 부부는 천황의 장례식날 나란히 할복자살, 여순 전투의 기이한 마침표가 되었습니다.


백옥산을 마지막으로 여순 일정을 끝내고 대련 중심가인 중산구로 돌아와 러시아거리를 둘러보는 것으로 대련여행을 마감한다.


러시아거리 : 대련은 중국에서도 번영한 도시 중 하나로, 동북 지역 최대의 항구 도시이다. 이에 일본, 러시아 등 열강들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았지만 그 시절에 도시가 발전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러시아 거리가 그 대표적인 흔적으로 요즘에는 이국적이고 독특한 관광지로 인기가 있다. 러시아의 한 거리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곳은 대련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이 만든 곳으로 100년 이상 된 전통 러시아 스타일로 지어진 가옥들이 30여 동 이상 남아 있으며, 각종 기념품과 러시아 인형 등이 판매되고 있다.